BOOK

이윽고 슬픈 외국어

오랜만에 붙든 ‘책’

전문 서적이나 기술 문서, 뉴스 등 정보를 전달하는 글 이외에 글을 읽어본지가 언제인지 기억 조차 나지 않는다. 분명 어렸을 적에는 책을 좋아했는데, 이제는 이야기가 있는 책은 어떻게 읽어야 되는지, 어떻게 읽었었는지 조차 먼 느낌이다. 작년 겨울, 인터넷 커뮤니티 자유 게시판을 무의미 하게 새로 고침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30주년이 되어 새 판형으로 한정판을 발매한다는 정보를 접했다. 고등학교 때 접해 본, 꽤나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소설이다. ‘한정판’, ’30주년’. 얼마나 구매욕을 불러 일으키는 좋은 말인가. 책을 읽지는 않아도, 관심이 가는 책 한 두권은 사는 것은 매번 주저하지 않는다. 한 권 사면 아쉬우니, 기왕인데 세 권은 사자. 마침 추천 목록에 올라온 책이 보였다. 내용은 잘 모르지만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이윽고 슬픈 외국어’, 그리고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두 권을 ‘노르웨이의 숲’과 함께 구매하였다.

그렇게 3권이 왔지만, 손이 먼저 간 것은 그중에서도 ‘이윽고 슬픈 외국어’였다. 하루키의 에세이집은 대학 1학년 때 읽었던 ‘위스키 성지 여행’ 이후로 처음이다. 당시 즐겁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서, 가볍게는 에세이가 좋겠다는 생각으로 먼저 읽게 되었다. 제목부터 마음에 들었다. 목차를 보니, 단편의 제목 중 하나를 따서, 전체를 묶은 것 같다. 원어 제목은 ‘やがて悲しき外国語’ 이다. 「やがて」라는 단어를 ‘이윽고’로 번역한 번역가의 솜씨에 감탄했다. 역시 번역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이윽고 슬픈 외국어

참 독특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제목이다. 많이 들어 본 단어들이지만, 저 세 단어의 조합은 처음 본다. 어떻게 하면 ‘외국어’가 ‘이윽고’ ‘슬프’게 되는 것일까. 누구에게나 외국어로 슬픈 기억은 있을 것이다. 성적이 안 나와서일 수도 있고, 외국에 나갔다 말이 통하지 않아 슬퍼진 기억이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더욱 제목이 마음에 들었는 지도 모른다. 이 책의 여러 단편 에세이들을 묶은 제목으로 이 ‘이윽고 슬픈 외국어’를 골랐다는 것은, 무라카미씨 본인도 외국에서 ‘이윽고 슬퍼지는’ 경험을 했고, 이 경험이 책 전체를 아우르는 것을 뜻할 것이다.

실제로도 이 책은 그런 내용이다. 작가 본인이 모국이 아닌 외국에서, 프린스턴이라는 한 장소에서, 수 년 간 체류하면서 느낀 ‘외국어’와 ‘외국’에 대한 내용이다. 자신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것을 객관적으로 보려면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상태여야 가능 한 것이다. 외국에 있어야 보이는 모국이 있고, 외국인이기 때문에 보이는 외국이 있는 것이다. ‘이윽고 슬픈 외국어’라는 글은, 외국인이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말할 때 느끼는 슬픔에 대하여 적었다. 모국어라면 간단하고 자연스럽게 넘어갈 표현도, 외국어로는 힘들다. 자신의 요지를 짦고 쉬운 말로 명확하게 하고, 중요한 부분은 반복해서, 간단한 비유를 섞어 말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외국어로 말을 잘 하는 법은 글을 잘 쓰는 법이다라고 하루키는 말하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이 세 점을 하루키는 이 글에서 모두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간단하고 쉬운 표현으로, 자신의 체험을 예시로, 중요한 점은 반복해서 그는 자신이 말하고 싶은 점을 말하고 있다.  참으로 재미있는 점이다. 글을 쓴다는 건 이런 것이라고 보여주는 것 같다.

하루키라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솔직한 사람 같다. 글을 읽으며 느낀 바로는 그렇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경험에서 느낀 점을 솔직하게 표현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이야기 하는 내용은 내 생각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가끔은 나도 이렇지 않나 라는 생각을 들게 하는 것도 있었다. 사회적으로 올바른 것(correctness)에 대한 이야기(‘대학가 스노비즘의 흥망’)이나, 지식인층의 딜레마에 대한 이야기(‘미국판 단카이 세대’)는 흥미로웠다. 주변 사람들이 당연한 듯 여기는 ‘올바른 것’이 정말 올바른 것일까? 라는 당연한 의문을, 오랜만에 다시 곱씹게 해 주었다. 미국의 달리기 대회의 진행 방식과 일본의 그 것을 비교한 ‘미국에서의 달리기, 일본에서의 달리기’라는 글은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목적과 수단이 언제부턴가 서로 뒤바뀌어 버리는 것은, 한국에서만 흔한 일이 아닌가 보다.

롤 캐비지를 멀리 떠나보내고

이 에세이 집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이 바로 ‘롤 캐비지를 멀리 떠나보내고’ 이다. 롤 캐비지라는 이름이지만, 주로 일본에서 많이 먹는 요리이다. 이 에세이 집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하는 글이 바로 ‘롤 캐비지를 멀리 떠나 보내고’이다. 작가가 소설가가 되기 전에 보낸 인생을 짤막하게, 학생들과의 질답의 형식으로 보여준다. 아직 젊은, 내년이 되어야 학교를 졸업하는 나에게 하루키가 말하고 싶은 글인 것 같이 느껴졌다.

“나는 학생 때 뭔가를 쓰고 싶었지만 무엇을 쓰면 좋을지 몰랐어. 뭘 쓰면 좋을지를 발견하기 위해 나에게는 칠년이라는 세월과 힘든 일이 필요했던 거겠지 아마도.”

정말 말 그대로다. 학교는 다닐만큼 다닌거 같은데, 뭘 하고 싶고, 뭘 ‘쓰면 좋을지’ 모르겠다. 하루키가 보낸 7년이란 세월은, 어찌보면 지금의 소설가 하루키와는 전혀 다른 세월이었다. 그런 세월이 나에게도 필요한 걸지도 모른다.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일이 모여 새로운 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써지지 않을 때는 무리해서 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는 것이 뭔가를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를 위한 하나의 어드바이스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다정한 듯 하면서도 다정하지 않은 문구다. 어드바이스가 되는 것 같지만, 어드바이스가 아닐지도 모른다. 무책임할 정도이다.

“그런 여러 가지 일이 딱하고 제대로 결합하는 계시적인 순간이 언젠가 올 거라고 생각하지. 뭐 적어도 그런 일이 꼭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 인생이 더 즐겁지 않을까?”

뭐, 그런 순간이 있을 지도 모르니, 기왕 사는거 즐겁게 사는게 손해 덜 보는 길 아니겠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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